한동안 참 멍하게 지냈던 것 같다.
올림픽 폐인이 되어 하루종일 멍하니 티비만 보기도 하고, 유학 간답시고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서 친구들과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의료비가 무지하게 비싼 미국에 가기 전에 온몸을 체크해야 한다며 안과, 치과, 피부과, 한의원 등등을 순회하고 안경점에서 안경+선글래스도 맞췄다. 그런가 하면 장학회 캠프를 시작으로 일본 여행과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알바와 논문, 그리고 공모전은 무기력 속에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시간들 속에서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출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준비가 내 속에서 얼마나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기대 반, 걱정 반. 이 걱정이라는 것도 굳이 싫지는 않다. 적당한 걱정과 스트레스는 오히려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될테니 말이다.
유학을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포부를 가질 필요도 있겠지만, 새로운 내가 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를 유지하는 일이리라. 나이가 들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내면화하고 짊어질 수 있는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뜻이다.
어제 신문에서 코넬대 MBA에서 최우수 강의상을 받은 박영훈 교수 관련 글을 읽었다. 그 중 인상깊었던 부분.
일단 편안해지면 애초만큼 투지나 깊이가 안 나와요.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게 달려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내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미루고 싶은 충동이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다급해지면 더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어..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 last minute 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은 왜 못하는가? 지금 이 순간은 버려도 될만한 것일까? 몇시간 걸리지 않는 논문 review 도 미루고 미루다가 최후의 순간에 하고 말았는데, 이걸 하기까지는 한 달이나 걸렸다.
지금 당장 편안해지고픈 마음은 결국 나에게 적인걸까.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유학생이 나의 롤모델인가. 아직도 답이 명확히 서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 나는 어떠한 답을 얻게 될지. 이게 걱정이자 기대이기도 하다. 중원을 정벌하러 나가는 제갈량처럼 출사표라도 쓰고 비행기를 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