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에 쓰는 블로그 글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사실 마음 한켠에는 다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해 왔다. 긴 글을 차분하게 앉아서 쓸만한 시간,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블로그는 뭔가 한물 간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런 와중에 그토록 내가 바라고 있던 Facebook-Wordpress 연동이 발표되어 한결 상황이 나아졌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새로운 분들을 만나면, “mcpanic 님이시죠?” ㅋㅋ 라며 은근히 블로그를 언급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이것만큼 내 생각과 경험을 나누기 좋은 매체가 아직은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속의 답답함과 고민을 풀어놓기에 가장 편한 공간이 이 곳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이 공간에 첫 글을 쓴 건 벌써 7년이 넘었다.
최근의 바쁜 일들이 많이 정리되고, 그야말로 조용하고 차분한 여름을 맞고 있다. 이제부터 박사가 끝나는 그 언젠가…까지는 연구만 열심히 하면 되는 상황인데, 참 마음같지 않다. 환경 탓을 할 것도 없다. 연구실과 교수님, 주위의 사람들의 지원도 너무 좋고. 근데 왜 그럴까. 뭐가 문제지?
초심을 잃은건가
초심을 잃은 건 아닐까. 이 블로그를 통해 나는 계속 “나는 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어찌보면 먼 길을 돌아왔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비전은 그 고민의 과정을 통해 꽤 단단해졌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learn) 만들고 (create) 나누는 데에 (share) 도움을 주는 인터페이스를 디자인 하는 것”. 그런데 요즘 그게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오히려 부족함이 없고 위급한 일이 없으니 안주하게 되는 것 같다.
분야는 다르지만 힙합이라는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정상에 올라 초심을 외쳐대는 Movement crew.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자주 듣는 노래. “꿈꾸며 바라봤지만 흔들려 현실에 갇힌 음악 속 목숨의 가치는” “난 Rhythm Rhyme Soul 을 미친놈 같이 파헤쳐대 / 난 처음처럼을 술주정꾼보다 자주 외쳐대“. 답답하고 안 풀릴 때일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다. 처음 스탠포드에서 HCI 프로젝트를 했을 때의 고지식한 방법론을 따라가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익숙해짐의 무서움은 생략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머릿속 계산으로 넘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방법론에 대한 의심
비전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강한데, 생각해 보니 문제는 그 비전까지 접근하는 과정과 방법론에 대한 혼란과 불확실인 것 같다. 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꼭 박사학위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학계의 접근 방식에 대한 불만도 있다. 논문을 찍어내기 위해 해야 하는 본질과 무관한 작업들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검증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결국 기존의 틀에서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 한다. 그것이 논문이든, 실제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서비스이든. 새로운 것이 나오려면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한다는 이상한 나만의 답답함도 문제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도 결국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사용 중인 설명의 틀을 ‘이용’해서 새로운 것을 판단하지 않는가. 또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보다 ‘사회적’ 의미의 창의성도 기존 집단 내의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스타일이 없다
나는 주위에 민감하다. 사람들의 반응과 생각에 늘 신경쓰고 사는 편이다. 장점이라면, 둥글둥글하게 별로 사람들과 갈등 없이 잘 지낸다는 것. 그러나 단점은,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유지하는 데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한 또 하나의 문제는, 어떤 일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내기보다는 내가 속한 그룹이나 환경이 요구하는 모습에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가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나만의 방식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모습과 맞아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남들 시선과 어울림에 신경을 쓰다보니 나만의 것이 없고 자신 없는 밋밋한 결과물로 연결되기도 한다. 위의 방법론 이야기와 연결해 보면, 나는 결국 “기존의 방법론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나만의 스타일도 없이 그냥 따라가면서 적응한다”는 우울한 결론이 나온다.
답은 하나다. 나만의 뚜렷한 가치관과 스타일이 있어야겠다는 것. 그 스타일을 가다듬고 키워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야 한다. 나로부터 뻗어나가는 것이 순서이다. 반대가 아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이 작업을 힘들지만 지금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