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박사과정 1년차. 나는 처음으로 밑바닥부터 내가 정의한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경험을 하고 있다. ‘처음’이 주는 긴장과 막막함, 설렘과 열정이 묘하게 얽혀 하루에도 몇번씩 리듬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중이다. 내가 연구주제를 정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 글을 쓴다. 숙련된 연구자들은 ‘아, 이럴 때가 있었지’, 나와 비슷한 상황의 학생들은 ‘맞아 이런 느낌이야’, 연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연구 주제를 잡는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를 느낀다면 이 글을 쓴 보람이 있을 것 같다 🙂 아참, 이 글에서 말하는 ‘연구’란 Computer Science 중에서도 HCI 연구에 국한함을 밝힌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일반적으로 적용가능한 내용이겠지만.
주제를 정하는 과정
연구주제는 스스로 흥미와 절실함을 느끼는 문제로 잡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박사과정 첫학기는 바로 이런 문제를 탐색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구체적으로 논문이나 동작하는 인터페이스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보다 세부적으로 내가 집중하고 싶은 문제를 발견했고 그 분야의 현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리고 이제는 막 풀기를 시작하는 중이다.
처음 교수님과 연구미팅을 할 때, 교수님이 ‘뭐하고 싶니?’ 라고 물으셨다. 그렇게 시작한 미팅은 학기가 계속 되면서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처음에는 ‘창의성 지원’에 대한 논문도 읽고 브레인스토밍도 하다가 ‘창의성 자체를 연구주제로 삼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고 일반론적인 연구밖에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럼 구체적인 활동을 정하기로 했다. 가능한 창의적인 활동을 화이트보드에 수십가지를 맵으로 그리고, 그 중 나 자신의 흥미와 연구동향 등을 고려해 ‘글쓰기’로 좁혀나갔다.
글쓰기도 여러가지가 있을텐데, 어떤 글쓰기에 집중해야 할지 정하기 위해 또 논문을 읽고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한편으로 글쓰기와 창의성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내가 가장 흥미와 절실함을 느끼는 ‘블로깅’을 주제로 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에서는 좋은 피드백의 역할이 크다. 주위의 훌륭한 교수님들과 동료 학생들이 주는 양질의 피드백이 아니었다면 주제는 표류하거나 엉뚱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연구에 있어 환경의 영향력은 크다.
“블로깅 툴을 연구한다?”
블로깅은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이다. 우선, 웹과 결합하여 이미지, 비디오, 링크 등을 첨부하여 보다 시청각적으로 풍성한 컨텐츠를 생산하기가 쉽다. 또한 URL만 있으면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용이하다. 그리고 쉽고 간편한 블로깅 플랫폼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만의 ‘출판’ 장벽을 확 낮춰주었다. 일단 공개가 된 글도 계속해서 수정 가능하다는 점에 있어서도 종이 출판과 차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질이 낮고 검증되지 않은 컨텐츠가 범람한다거나, 저작권이나 펌질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풍성한 컨텐츠를 넣기가 복잡하거나 어렵고, 보다 많은 독자의 피드백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과제도 있다.
창의성 -> 글쓰기 -> 블로깅 으로 좁혀 들어오면서 주의했던 점은, 큰 그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창의성을 지원하겠다는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블로깅이라는 도메인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3가지 정도의 문제가 윤곽을 드러냈다.
초보의 실수: 욕심
이 정도 되니 신이 났다. 거의 한 학기동안 재미는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것 같아서 좀 초조했는데, 드디어 무언가 실질적인 걸 해볼 수 있는 단계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가지 아이디어를 모두 담은 paper prototype 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구했다. 역시 혼자 생각할 때와는 또 다른 많은 의견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랩미팅 때 장황하게 이런 것들을 했고, 이렇게 많은 피드백을 받았고, 앞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발표를 했다. 이때 가장 많이 나왔던 조언은, ‘한번에 너무 많은 문제를 풀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한번의 ‘좁혀나가기 (narrowing down)’ 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박사과정 때 배우는 건 ‘아무도 관심없어하는 문제를 혼자 풀어서 이 문제에 대한 1인자가 되는 법’이라는 얘기도 있으니 뭐.. 물론 이 말의 핵심은 그만큼 박사과정에서 다루는 문제는 파고들고 파고들어 그 속의 다양한 요소들을 연구자 자신이 꿰뚫어보고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문제는 굉장히 세세한 수준에서 정의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렇게 ‘제대로 푸는 법‘을 훈련받고 박사를 받고 나면 다른 문제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보이기 시작할 것 같다. (이상적으로는 ㅎㅎ) 그러면서 조금씩 내가 다루는 문제들이 넓어지고, 다시 세상과 만나게 되는 것일지도! (블로깅 -> 글쓰기 -> 창의성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창의성 지원 툴의 대가가 된다거나..)
주제와 연구자의 관계
당연하면서도 신기한 한 가지는, 다른 학생이나 연구자를 만나서 그 사람의 스타일이나 성향 등을 어느 정도 알고 나면 그 사람이 하는 연구가 ‘참 그사람 답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연구자에게 있어서 연구주제는 단순히 현재 관심있게 보고 있는 문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주제 속에는 그 사람의 세계관과 성향 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거나 논문이 나올만하니까 뛰어드는 것은 스스로의 정신건강과 커리어 모두를 위해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한 연구 속에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CV나 이력서를 보면 단순히 논문의 숫자와 질 뿐 아니라 이 사람의 연구 스타일, 관심사, 인맥, 특정 토픽에 대한 관점 등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내가 1저자가 되어 쓰는 논문들은 하나하나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내 연구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이렇게 ‘자신(self)’이 담겨있는 연구를 하면 ‘자신(pride)’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창 석사 하면서 힘들 때 썼던 자신감이 없다구? 글에 당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ㅎㅎ
찾기와 풀기는 다르다
석사과정 때에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데에만 집중했다. 문제를 찾아내고 정의하는 나머지 반쪽은 간접적으로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문제를 찾는 것과 푸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는 작업이다. 문제를 탐색하고 정의할 때에는 구체적인 알고리즘, 기술, 실현가능성보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의미가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에 관찰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문제의 성격을 보다 객관적이고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내 실력과 지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인가는 물론 중요한 잣대이지만 여기에 연연해서는 좋은 문제를 찾을 수 없다. 좋은 문제를 찾고 나면 푸는 방법은 또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