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박사 2

박사 2: 탐색과 방황

2011.9 – 2012.8

인턴십

여름에 Adobe에서 인턴십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새 2년 차. 딱히 해놓은 것도 없는데 벌써 박사과정의 1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좀 무서워졌다. Rob은 박사과정 동안 세 번 정도 연구 인턴십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HCI 박사과정 학생은 적어도 한두 번은 기업 연구소에서 인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Microsoft, Adobe, Autodesk, PARC, IBM, Google 등의 기업에서 HCI 관련 연구가 활발했다. 대부분 학생은 인턴십 프로젝트를 CHI, UIST, CSCW 등 분야 최고 학회에 논문으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인턴십 동안 함께 일한 멘토와 후속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 같은 곳으로 인턴을 반복해서 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이렇게 인턴십 경험이 있으면, 나중에 졸업할 때 그 연구소에 취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학교에서 지도교수와 하는 연구 이외에 더욱 다양한 연구경험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연구 인턴십은 공식 지원 절차도 있고 인터뷰를 보는 때도 있는데, 사실상 지도교수와 학생의 “인맥”을 통해 결정되는 경우가 주위에 대부분이었다. 기업 연구자가 친한 동료 교수에게 좋은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으면 직접 접촉하기도 했다. 나는 총 4번의 인턴십을 했는데, 첫 인턴십을 했던 IBM Research는 석사 지도교수이던 Scott에게 학생추천 의뢰가 왔고, 내가 해보겠다고 해서 인터뷰를 통해 합격했었다. 두 번째 인턴십을 했던 Adobe Research는 내 멘토였던 Joel이 Stanford HCI Group 출신으로 나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MIT에 한 학기 동안 방문을 와서 나를 “점찍어” 데려갔다. 세 번째 인턴십을 했던 edX는 조금 특이하게 내가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 갔다. 이 과정과 경험에 대해서는 다음 편 (박사 3)에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다. 마지막 인턴십은 Microsoft Research에서 했고, 운이 좋게 멘토였던 Merrie와 Andres가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해 인턴십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왔다. 확실히 좀 더 연구가 성숙하고 커뮤니티 안에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기회의 폭이 넓어졌다.

인턴십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돈이었다.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학교에 있는 대부분의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학교 혹은 교수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학생이기도 하지만 연구실에 소속되어 research assistant로 일하는 셈이다. MIT의 경우 1년 학비가 45,000불 정도인데, 이 비용과 함께 한 달에 2,000~2,500불 정도의 월급 (stipend)을 받는다. 집값이 보통 1,000~1,500불 정도 나가기 때문에 사실 손에 남는 건 별로 안 된다. 교수로서는 학생 하나를 1년 동안 지원하려면 학비, 월급, 학회, 장비 등을 합쳐 80,000~100,000불 정도가 필요하다. 그러니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좋은 학생을 뽑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외부 장학금이 있는 학생은 싸게 먹혀서 좋은 점이 분명 있다. CS 분야에서 연구 인턴십은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흔했다. 여름에 12주 정도를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월급은 7,000~8,000불 정도. 한국보다 훨씬 높은 세금을 떼고 집값을 내고 나면 한 달에 3,000불 정도 손에 들어온다. 그래도 대학원생으로서는 stipend보다 목돈이 생기니 금전적으로 이득이 된다.

창의성에서 학습으로

창의성 지원 도구에 관한 연구를 하던 나는 Adobe 인턴십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주요 제품인 Photoshop, Illustrator, Acrobat, Premiere가 창의적인 이미지, 영상, 문서 작업을 하는 전문가들에게 필수적인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들과 연동시켜 창의성 지원 도구를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막상 회사에 가보니 실상은 조금 달랐다. 창의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각종 기능은 이미 툴 안에 꽉 채워져 있었다. 수백 가지의 화려하고 복잡한 기능이 있었지만, 전문가조차도 그 중의 극히 일부만 사용한다는 데이터가 있었다. 반대로 툴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있는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툴의 기본 원리를 습득하지 못하는 사용자가 늘어갔고, Adobe의 당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이 복잡한 툴을 보다 쉽게 학습할 수 있게 돕는가였다. 진정 사용자의 창의적 활동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개념과 도구의 학습”을 도와야 한다는 간단하지만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인턴십 프로젝트는 Photoshop에 도움이 필요한 사용자를 전문가와 온라인으로 연결해 주어서 화면공유, 음성채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학습을 도와주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당시 유행하던 Words with Friends라는 소셜 단어 게임을 변형해서 Photoshop with Friends로 정했다.

몇 년 동안 창의성 지원을 생각하면서 했던 많은 고민이 해결되는 시간이었다. 1년 차 때 글쓰기 도구 프로젝트를 하면서 과연 창의성의 향상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과연 글 쓰는 데에 들어가는 잡일을 줄여주면 창의성이 향상된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을 했다. 학습의 측정 역시 만만치 않게 힘들지만, 적어도 더욱 검증된 기법이 존재했고,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 학습이 선결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내 연구의 방향은 학습을 돕는 도구가 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먹고사는 일

내가 유학생으로 살면서 가장 힘든 건 사실 먹고사는 문제였다. 요리는 소질도 의지도 없어서 거의 하지 않았고, 혼자 길게 시간 들여 무언가를 해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 시간에 다른 걸 하고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은 건물 1층 식당이나 근처 학교 식당에서 주로 해결했다. 혼자 식사를 사 와서 내 자리 모니터 앞에서 먹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근섭, 태수, 용욱 등의 CSAIL에 있는 친구들과 먹었다. 저녁은 좀 더 외로웠는데, 보통 식사를 사 와서 집에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혼자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가끔 역시 CSAIL에 있는 예일, 병권이 형, 재환이 등과 맥주 한 잔을 했다. 밤에 답답할 때는 근섭이랑 가끔 한국 노래방에 가서 남자 둘이 세 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오기도 했다. 과에 있는 한국 친구들은 신기하게도 롱디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고, 매달 있었던 과의 한국인 모임에서는 박사과정의 우울함과 막막함, 롱디의 우울함과 막막함이 주요 대화 주제였다.

연구와 일은 외국인들과 영어로, 휴식과 소셜 활동은 한국인들과 한국어로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데에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만 한 것이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정작 밖에서 노느라 바빠서 거의 보지 않았었는데, 박사생활이 진행될수록 매일의 방송 일정과 최신 예능 트렌드를 꿰는 수준이 되었다. 그들의 재밌는 대화와 경험이 마치 내 것인 양 간접 경험을 통해 재미와 안정을 찾았다. 미국 뉴스보다는 한국 뉴스를 봤고, 미국 드라마보다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과 웹툰을 봤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 자체가 문제였지만, 시간이 좀 지나 영어가 조금 편해지고 나니 문화적 이질감이 크게 느껴졌다. 교수님, 그룹 친구들과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일 이외의 대화가 늘어나 좋기는 했지만,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알아듣고 공감하기 어려운 단어와 표현이 대화 중에 많이 나왔다. 연구 이야기를 할 때는 활발하게 참여를 하다가 일상대화가 나오면 내 지분과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다. HCI 분야의 특성상 미국인이 대부분이고 외국학생이 적어서 더 그런 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할로윈에 왜 저런 분장을 하고 옷을 준비해 입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했고,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기보다는 집에서 쉬거나 여행 가는 것이 더 좋았다. 내가 미국 땅에서 주류로 살아남으려면 이 문화를 아는 것뿐 아니라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마음이 따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즐기는 척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연구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으므로. 내가 졸업을 하고 이 땅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 것인지, 그렇다면 내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안정, 방황

2년 차는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했다. 1년 차 때 논문 저자 문제 때문에 아팠던 경험과 정신없는 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니 조금은 안정이 찾아왔다. 연구그룹 분위기도 좋고, 지도교수 두 분과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박사 2년 차는 1년 차만큼 설레거나 의지로 가득하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너무 지치거나 걱정이 많은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저냥 때우며 보내기 쉬운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졸업이나 논문에 대한 압박이 큰 것도 아니고 환경이나 랩 적응은 어느 정도 되었고. 일주일에 2~3일 잠 제대로 못 자는 거야 마찬가지지만, 그것도 이제는 만성이 되어 긴장감보다는 한숨과 만성피로 속에 지샌달까.” — 2011.10.31 “웅크리고 있다” 중

신기하게 안정이 찾아오니까 마음이 더 불안하고 답답해졌다. 학부, 석사 때는 늘 분명한 단기목표가 있었다. 수업에서는 시험을 보고 학점을 받아야 했고, 석사 때는 연구를 해 추천서를 받고 좋은 학교에 박사로 가야 했다. 박사 2년 차의 상황은 여유가 있는데 묘하게 답답했다. 당장 이루어야 할 단기목표가 없었고, 누구도 내가 오늘 일어나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해주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어서 미팅만 없으면 평일 낮에 티비를 몇 시간씩 보거나 Charles 강을 두 시간씩 산책할 수도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혼자 하는 내 연구밖에 없기 때문에 며칠 성과가 없더라도 당장 티가 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자유가 처음에는 한없이 좋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이 근본 원인은 박사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연구자로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임팩트란 무엇인가. 학계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혹은 꿈과 비전을 생각했을 때 해야 할 일들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생각해보면 답답하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알고리즘 교과서를 읽을 때나 대체 누구를 위한 연구인가 싶은 미적지근한 논문들을 읽을 때면 학교를 당장 뛰쳐나가 나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싶기도 하고. 벤처라도 해볼까 싶다가도 비전없이 근시안적으로 뛰어드는 one of them이 될까 두렵고. 연구를 하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당장에라도 나올 것만 같다가도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내 결과물이 부끄러워 슬프다.” — 2011.10.31 “웅크리고 있다” 중

그리고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학문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했다.

“비전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강한데, 생각해 보니 문제는 그 비전까지 접근하는 과정과 방법론에 대한 혼란과 불확실인 것 같다. 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꼭 박사학위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학계의 접근 방식에 대한 불만도 있다. 논문을 찍어내기 위해 해야 하는 본질과 무관한 작업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검증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결국 기존의 틀에서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 한다.” — 2012.07.21 “삶의 스타일을 찾아” 중

그러다가도 좋은 연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에 대해 고민을 하기도 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가다듬고 큰 그림과 소소한 디테일을 두루 챙기고 고치고 빼고 넣고 뒤집고 삽질하고 코드 갈아엎고 날카로운 질문들에 말도 더듬어 보고 싫은 소리도 하고 연구를 미워도 했다가 사랑도 했다가 온갖 드라마를 겪고 나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아니면 너무 부끄러운 꼴을 많이 보아서 다른 사람들이 줄 부끄러움은 아무렇지도 않은, 연구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러고 나면 읽을 때는 간결하고 오히려 너무 심플해보이지만 읽고 나면 그 연구 속의 깊은 가치와 임팩트가 여운처럼 남는 논문이 나올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흐뭇한 상상을 한다.” — 2011.03.30 “초조한 시간들, 그 속의 나” 중

지식을 만드는 학자로서의 자세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논문 하나를 찍어내는 것이 아닌,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방법론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나만의 스타일도 없이 그냥 따라가면서 적응한다’는 우울한 결론이 나온다.

답은 하나다. 나만의 뚜렷한 가치관과 스타일이 있어야겠다는 것. 그 스타일을 가다듬고 키워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나로부터 뻗어 나가는 것이 순서이다. 반대가 아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이 작업을 힘들지만 지금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든다.” — 2012.07.21 “삶의 스타일을 찾아” 중

그러면서 정신건강이 나빠졌다. 머릿속에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떠다녔고, 그중 많은 것들은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 당시 나를 지배하던 정서는 “불안함”이었다. 연구의 방향은 조금씩 잡혀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운동과 식단을 조절해서 신체건강을 챙기듯 자신을 보듬으면서 정신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창업?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갈 때쯤, 창업과 스타트업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박사과정의 너무 많은 자유도와 높은 불확실성, 막연함에 대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보다 구체적이고 당장 눈에 보이는 뭔가가 나오는 것이 스타트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MIT에서 MBA를 하던, OnDemandKorea 라는 회사를 막 시작한 동갑내기 영준이를 만났다. 미국에 한국 방송 컨텐츠를 합법적으로 들여와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아이디어였다. 그 당시 미국에 있는 많은 사람이 불법 스트리밍 서비스나 웹하드에서 다운로드를 받아 한국 방송을 접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 시장인지는 몰라도, 잘만 하면 분명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비디오 인터페이스에 대한 관심이 많던 터라 자연히 관심이 생겼고, 기본 스트리밍 이외에 사용자를 보다 플랫폼에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함께 브레인스토밍했다. 영준이, 그리고 다른 창업멤버였던 Sam, 준석이는 Cambridge 북쪽의 집 하나를 빌려서 홈오피스로 만들어 일했다. 시작하는 스타트업이 그렇듯 당장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가질 수 있다는 꿈과 열정이 있었다. 나는 완전 내부인도, 외부인도 아닌 위치에서 이 친구들을 종종 놀러 가 미팅도 하고 수다도 떨었다. 냉동 치킨너깃, 피자와 맥주를 주식으로 먹으면서 열심히 준비하는 이 친구들의 모습에 나도 좋은 자극을 많이 받았다. CEO 영준이는 과묵하면서도 준비하는 것들을 하나씩 차분히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많고 큰 그림 그리는 것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실행력이 부러웠다. 회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으면서 위치를 한국 방송사의 미국 지사가 있는 LA 지역으로 옮겼다. 그 이후로는 직접 도움을 많이 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몇 번의 큰 위기를 넘기고 지금은 꽤 안정적으로 회사를 키워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뿌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당시 MIT 학생이던 주변 분들 몇몇과 뭐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Cuedit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내가 1년 차 때 하던 글쓰기 도구와도 연관이 있었는데, 현재 사용자의 관심사나 글을 기반으로 개인화된 뉴스나 정보를 카드 형식으로 바로바로 보여주는 아이디어였다. 브레인스토밍하고 시장조사를 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간단한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몇 군데 창업 투자 프로그램에 지원도 했었다. 나름 크고 야심 찬 아이디어였고 재미있게 몇 달 동안 작업을 했지만 결국에는 접기로 했다. 아이디어가 Scott이 그렇게 강조하던 보다 구체적인 사용자의 니즈에서 나오지 못했고, 무엇보다 다들 이게 아니더라도 “돌아갈 안정된 곳”이 있었다. 모든 걸 던질 용기를 가질 만큼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창업을 실제 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비슷한 경험을 몇 달 동안 압축적으로 하면서 많이 배웠다. 실행력, 사용자의 요구, 시장, 임팩트…. 학문과 실용의 결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CS와 HCI 연구에도 적용되는 키워드들이다. 박사과정 관점에서는 몇 달을 날리다시피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간을 통해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연구이고, 또 내가 세상에 가장 이바지할 수 있는 방식 역시 연구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환점이 된 순간 1: 영상을 통한 학습

생각이 많고, 벌여놓은 다른 일이 많으니 자연히 연구는 표류하고 있었다. 1년 차 때 하던 글쓰기 도구 연구는 UIST에 떨어지고 여름 인턴 다녀오면서 방치되었고, 나는 다음 방향을 잘 못 잡고 있었다. 여름부터 하던 Photoshop with Friends 프로젝트는 야심 차게 CHI에 냈지만 떨어졌다. 가을, 겨울 동안 계속 진척이 있었지만, 지도교수 둘에 Adobe 멘토 둘과 매주 미팅을 하면서 내가 자신감 있게 이끌어가지 못했다. 프로젝트의 방향이 두세 번 완전히 바뀌면서 휘청거렸지만, “학습”이라는 키워드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프로젝트는 Adobe 멘토 둘의 주요 관심사에서 조금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둘은 프로젝트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학습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게임처럼 만들어 즐기면서 배우게 하고, 팀처럼 협동해서 프로젝트를 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상했다. 하지만, 잠깐 반짝하는 “오 괜찮은데!”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여지없이 이미 되어 있거나 지루하거나 불가능한 아이디어의 반복이었다.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의 기술적, 디자인적 한계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웹상에 널려있는 수백만 개의 학습 비디오를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YouTube 같은 영상 사이트에 사람들이 수학, 통계, 프로그래밍, Photoshop, 요리, 메이크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엄청난 양의 학습 영상을 올리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이 비디오들은 크라우드소싱 된 지식의 집합체였다. 하지만 비디오는 언제 어떤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지 일일이 찾아보기 전까지는 알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비디오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탐색과 검색의 단점을 극복하고 유용한 학습 컨텐츠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Rob과의 연구 미팅에서 아이디어를 던졌다. Rob은 바로 이거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보다 더 신나서 화이트보드에 엄청난 양의 관련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연구하다가 처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Rob은 이걸 계속해보자고 했다. 후에 박사 논문의 한 축이 된 비디오 학습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내 박사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세 개의 순간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비디오 학습 아이디어를 처음 Rob과 논의한 이 미팅이었다.

결혼

연애와 롱디는 기대 이상으로 순탄했다. 경제학 연구를 하던 지희는 공대 같은 연구실 문화가 없어서 비교적 자주 Boston에 방문할 수 있었다. 둘이서 암묵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보자는 원칙을 세웠고, 고맙게도 시간이 좀 더 유연했던 지희가 자주 서부에서 동부로 날아왔다. 카드값도, 항공사 마일리지도, 사랑도 쌓였다. 졸업도, 졸업 후 직장도, 같이 살 수 있을지의 여부도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지만, 이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12년 여름, 결혼했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