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유독 초조한 날이 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배째고 쉴 수 있는 용기 또한 없고, 이 악물고 열심히 하려해도 잘 안 되고. 수업에 연구에 미팅에 페이퍼에 할 일들이 쌓여가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오히려 자극이 되어 일이 잘 되다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순간 멍해지면서 정신줄을 놓게 된다. 오늘이 좀 그런 날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묘한 ‘경지’에 다다랐다.
일이 많아질 때 나타나는 한 가지 증상은 규칙적인 잠 시간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남들 일할 시간에 바짝 열심히 해서 알찬 하루를 마치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멋진 상황을 항상 꿈꾸지만, 실상은 정반대에 가깝다. 초조함에 집중이 안 되고 멍한 낮시간을 보내고 나면, 피곤이 몰려와 초저녁에 잘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서는 몇시간을 자고 일어나 대충 12시나 1시부터 ‘새벽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간은 이메일도 미팅도 수업도 잡일도 없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온갖 걱정과 불안감, 유독 안 좋은 기억들과 열등감 폭발이 동시에 일어나기에도 참 좋은 시간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든 제대로 써보기 위해 스스로와 씨름을 하다 보면, 다시금 피로가 마구 몰려올 즈음에 불안감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몸과 머리와 마음이 완전히 방전되기 직전까지는 나의 시간이 된다. 그렇게 아침이 되어 한두시간을 자고 나면, 또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연구가 즐겁고 보람차다는 것이다.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하는 것에 비해 연구 자체와는 무관한 쓸데없는 고민과 트라우마가 이따금씩 찾아와서 괴롭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쓴 생각거리들이 좋은 각성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좇아서 긴 시간을 탐색하고 배워오고 기다려 온 것이니까, 그만큼 애착이 생기는 듯도 하다.
이제는 마냥 눈에 보이는 성과나 논문 숫자 늘리기에 신경쓰기보다 제대로 된 마인드와 철학을 가진 연구자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 좀더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10페이지 남짓 되는 짧은 논문 한 편에도 그 사람의 깊이와 열정은 드러나나보다. 나보다 이런 센스와 경험이 훨씬 뛰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쓴 논문을 읽고 ‘깊이와 열정’에 대한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니, 빨리 논문 하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싶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가다듬고 큰그림과 소소한 디테일을 두루 챙기고 고치고 빼고 넣고 뒤집고 삽질하고 코드 갈아엎고 날카로운 질문들에 말도 더듬어 보고 싫은 소리도 하고 연구를 미워도 했다가 사랑도 했다가 온갖 드라마를 겪고 나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아니면 너무 부끄러운 꼴을 많이 보아서 다른 사람들이 줄 부끄러움은 아무렇지도 않은, 연구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러고 나면 읽을 때는 간결하고 오히려 너무 심플해보이지만 읽고 나면 그 연구 속의 깊은 가치와 임팩트가 여운처럼 남는 논문이 나올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흐뭇한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