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돌아보며: 박사 4 Part 2

박사 4-2: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는 길

2014.1 – 2014.8

새해를 맞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자극을 가득 안고 한국에서 돌아왔다. 4월에 있을 UIST 학회 데드라인을 향해 본격적으로 뛰어야 할 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논문에 있어 조금의 성공을 맛보고 나니 좋은 흐름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2014년 봄과 여름은 전체 박사과정 중 가장 열심히 연구에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기나긴 탐색이 지나고 방향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했고, 연차가 주는 성과에 대한 압박도 있었고, 롱디를 끝내는 길은 연구 잘하고 졸업해서 지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뿐이라는 강력한 동기도 있었다. 수업이나 조교 의무도 모두 마쳐서 연구 이외에 딱히 얽혀있는 일도 없었고, 오로지 연구에 올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때 내 머릿속을 덮고 있던 생각은 “내 연구”를 원 없이 펼쳐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디오를 활용한 온라인 교육에 크라우드소싱을 접목하는 주제로 전체적인 박사 연구의 흐름이 잡혀가는 상황에서 두 갈래의 연구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나는 edX 인턴십에서 했던, 같은 영상을 시청하는 수많은 학습자의 시청 패턴을 반영하여 학습에 도움을 주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디자인하는 방향이었다. 다른 하나는 CHI에 좋은 점수로 합격하여 한껏 고무되어 있던 ToolScape 연구의 연장선으로, 시스템이 직접 학습자에게 영상 내용을 요약하도록 질문을 던져 양질의 요약을 얻어내는 기법이었다. MOOC에서 시작된 온라인 교육의 광풍과 더불어 이러한 흐름이 학교 교육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학교 내에서도 관심과 우려가 동시에 커졌다. 대학원 학생회에서는 online learning subcommittee를 구성했다. 나는 이 위원회에 들어가 다른 학생들과 토론도 하고 기회를 살릴 수 있는 방향도 고민하고 정책 제안에도 참여했다.

LectureScape

박사과정 동안 연구실이 재정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험을 하거나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 돈에 영향받지 않고 하고 싶은 연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좋았고, 제안서를 써보거나 학계의 생리를 속속들이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Rob은 소수의 학생으로 연구실을 꾸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Quanta라는 대만회사에서 거의 gift 형태로 어마어마한 돈을 우리 학과에 지원하고 있어서 제안서를 쓰거나 스폰서를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적었다. 거기다 다행히 장학금이 있기도 했고… 이것이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사실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연구가 기본적으로 돈 없이는 진행할 수 없고 스폰서에게 돈을 제대로 쓰고 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연차가 올라가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이 바쁜 MIT 교수들도 20명씩 단체로 대만 Quanta 본사에 매년 방문해 세미나도 하고 튜토리얼도 진행했다. 이번 방문에는 Rob이 Elena와 나를 데리고 갔다. 포스터를 만들어 가서 Quanta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피드백도 받았다.

1월, 대만에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동안 구상하던 LectureScape의 아이디어를 Rob에게 설명했다. 4월 데드라인인 UIST를 노려보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교수의 반응이 학생에게 주는 임팩트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별로라고 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Rob은 굉장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라고 해주었고 잘 만들어보자고 했다. 이전 사용자의 사용 패턴이 인터페이스에 직접 반영이 되어 후속 사용자의 경험에 영향을 준다는 개념을 가지고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LectureScape은 이 개념을 가지고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다양하게 탐색하고 소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꽂혀있던 아이디어는 비디오 내에서 매초마다 학습자들이 멈춘 정도나 되돌려 본 정도를 알아내고 이를 후속 학습자에게 유용한 정보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디오 밑에 표준으로 달린 기존의 일자형 타임라인에 초당 중요도나 주목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추가하고, 나아가서 비디오를 스크롤 하면서 빨리 이동할 때 이 그래프를 따라 언덕을 넘는 듯한 경험을 구현했다. 높은 언덕, 즉 많은 사람이 돌려본 부분에서는 스크롤에 마찰을 더해 속도를 느리게 해 더욱 주목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다 동적인 스크롤링을 구현하는 기법 자체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고민했다. Rob과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비디오 학습에서뿐만 아니라 모바일에서 긴 웹페이지를 보는 상황에서 내용의 중요도나 사람들의 반응 정도에 따라 페이지의 스크롤링 속도를 동적으로 조정하는 기법을 생각해냈다. CAKS(Content-Aware Kinetic Scrolling)라 이름 붙인 이 기법을 가지고 역시 UIST를 노려보기로 했다.

연구 방향이 속속 잡혀가는 것은 좋았는데 두세 달 남짓의 짧은 시간에 두 논문을 동시에 만들어나가다 보니 일손이 너무 부족했다. 적극적으로 협력할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LectureScape은 영상 속 음성이나 자막 컨텐츠를 활용하는 부분이 필요해서 자연언어처리와 음성 데이터 연구를 하는 친구들을 섭외했고, 전체 흐름을 잡는 부분에서 Philip의 도움을 받았다. CAKS는 가속을 모델링 하는 부분에서 수학적인 접근도 필요했는데, 경제학이 워낙 수학적이고 하니 지희를 섭외(?)했다. 1년 차 박사과정이던 Amy는 적용 예제를 만들고 스터디 진행하는 것을 도왔다. 거의 한 달 정도는 잠을 거의 못 자면서 논문 두 개를 어찌어찌 제출했다.

내가 속한 CSAIL에는 홍보를 전담하는 기자 출신의 직원이 있었다. PI(Principal Investigator: 교수와 research scientist 포함)가 100명이나 되는 조직이다 보니 홍보 거리도 많고 MIT라는 네임밸류가 있어서인지 언론의 주목도도 높았다. 이 직원은 연구실별로 좋은 기삿거리를 찾아다니는데, Rob이 LectureScape을 홍보해 보면 좋겠다고 해서 이 직원과 만났다. 연구를 설명하고 데모를 보여주고 기사 방향에 대한 논의를 했다. 기사를 그쪽에서 보내주고 내가 피드백을 주어 다듬는 과정을 두 번 정도 거쳤다. 그러고 나서 이 직원은 학과 홈페이지MIT News에 기사를 게재하고 관심이 있을 만한 주요 매체에 뿌렸다. 그중에 Forbes 같은 곳에서도 연락이 와서 기사화가 되었다. 어떻게 대중에게 연구를 효과적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그 가치를 설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운, 색다르면서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두 논문 다 처음에 간당간당한 점수가 나와서 노심초사했는데, 기적적으로 둘 다 UIST에 합격을 했다. 여름 인턴을 하던 Seattle 모 상가의 주차장 차 안에서 합격 이메일을 확인하고 혼자 소리 지르며 느꼈던 순간의 짜릿함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 드디어 뭔가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Crowdy & Learnersourcing

ToolScape에서는 크라우드소싱을 통해 전문성이 없는 일반인들이 영상 속의 주요 내용을 효과적이고 높은 정확도로 요약해낼 수 있고, 이 데이터로 향상된 비디오 플레이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다음으로 던졌던 질문은 영상을 시청하는 학습자가 직접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단순 요약이 아니라 subgoal label이라는 요약의 요약, 즉 책으로 치면 챕터와 섹션 제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였다. 이러한 요약이 만들어지고 나면 후속 학습자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필요한 내용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학습자들이 영상을 요약하는 작업 자체가 자신의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크라우드소싱의 일반적인 형태가 많은 사람의 사간과 노력을 돈을 주고 사서 원하는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우리가 생각한 모델은 학습자가 금전적 보상 없이 자신의 학습을 위해 하는 자연스러운 행위(영상의 요약)가 크라우드소싱 형태로 모여 후속 학습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개인(영상을 통한 학습)과 시스템(양질의 요약 컨텐츠 확보)의 목적이 다르지만 하나의 시스템을 통해 양쪽 목표가 동시에 달성되는 윈-윈의 학습 모델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온라인 교육 환경에서는 수천, 수만 명의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규모가 기본전제인 크라우드소싱을 적용하기 좋고, 요약과 같은 작업을 통해 학습자들도 학습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2013년부터 흥미로운 방향이 될 것 같아서 CHI에 포스터로 냈었고, 학습과 크라우드소싱을 접목한다는 의미로 learnersourcing (우리말로는 학습자 크라우드소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개념을 처음 발표하고 몇 달이 지나서 제대로 달려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결국 learnersourcing은 내 박사 논문의 주제가 되었고, 내 job talk의 주제가 되었고, 내 연구를 아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Rob은 이 프로젝트를 학부생 인턴과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Rob은 학부생들에게 다양한 연구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일종의 사명감도 느끼는 듯했다. 2013년 여름에는 20명 학부생 인턴을 선발해 연구 bootcamp를 운영하기도 했고, 매 학기 3-5명 정도의 학부생을 연구실의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시켰다. 흔히 학부생 인턴은 “hit or miss”라고 했다. 여러 개의 수업과 과외 활동 등으로 안 그래도 바쁜 학부생에게 많은 연구실적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그 와중에 연구에 큰 흥미를 느끼고 열심히 참여해서 돕는 뛰어난 학생들이 더러 있고, 이런 학생들은 연구를 계속해서 학계의 동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러 명의 학부생과 일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 그런 대박 학생을 만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Rob은 HCI 학부 수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인 학생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인턴십을 제안하고는 했다. Sarah도 그런 학생 중 하나였는데, 연구실 내 프로젝트 중 내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만나보았다.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를 굉장히 재밌어하는 것 같았고, 겸손하면서도 적극적인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Sarah와 같이 일을 시작했고, 비디오 학습자들이 subgoal labeling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나는 이 시스템이 해야 할 일이 워낙 분명했고 나오기만 하면 이래저래 임팩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Sarah가 시스템의 전반적인 구현을 하고, 나는 주로 멘토링을 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advisor 역할을 했다. 내가 직접 시간을 많이 쏟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LectureScape 프로젝트에 집중하면서도 이 프로젝트도 꾸준히 진척이 있어 좋았다. 그러면서도 모호했던 연구실적 구분 때문에 힘들었던 석사 시절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면서 연구 실적의 “소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1저자를 하고 싶다는 욕심은 계속 있었지만, Sarah가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에 고민과 Rob과의 상의 끝에 논문 쓰기를 주도적으로 한다는 전제하에 Sarah에게 1저자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 논문은 결국 CSCW에 합격했고, learnersourcing의 대표 논문 중 하나가 되었다. 가끔 이 논문의 1저자가 내가 아닌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연구를 내가 지휘했고 내 박사 논문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또 성공적인 멘토링 경험도 얻었다. Sarah는 Crowdy 연구를 가지고 CHI의 학부 Student Research Competition에 나가서 2위를 했다. 내 아이디어를 이렇게 재밌어하고 열심히, 또 성공적으로 구체화시키는 학생과 함께 일하는 경험은 내가 혼자 해냈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기쁨을 주었다. 교수가 되면 이런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BudgetWiser

지금 생각하면 이때 어떻게 이런 일들을 다 감당했나 싶은데, 박사 연구와 조금은 무관하게 제3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겨울에 한국에 가면 대전에는 연고도 없고 아내를 두고 서울 가서 놀기도 애매하기 때문에 아내 연구실에 따라 나가 있으면서 일도 하고 놀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희랑 자연히 연구 얘기도 하고 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나왔다. 지희가 사람들이 자기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알게 되면 세금을 뿌듯하게 잘 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문득 “크라우드소싱 하지 뭐”를 외쳤다. 그래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크라우드소싱을 해서 예산과 세금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동시에 집단지성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둘이 이 방향에 꽂혀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자끼리 결혼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지희는 이 아이디어로 교내 연구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연구비를 따냈다. 일단 나는 메인 연구가 있기도 했고 지희는 막 부임해서 학생이 없던 상황이라 전산학과 경제학에 둘 다 관심이 있던 KAIST 학부생인 이창원 씨를 섭외해 연구를 시작했다.

야심 차게 시작은 했지만, 세금, 예산, 시민참여 등에 대해 상식 수준 이상으로 아는 게 없다 보니 막연했다. 일단 현상을 파악하고 기회를 찾아보기 위해 HCI 프로젝트의 기본인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밟았다. 전직 국회의원, 국회의원 보좌관, 기획재정부 공무원 등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예산에 대한 인식을 묻는 설문을 돌렸다. 전문가들은 예산이라는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시민들에게 유의미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에 좀 더 속도가 붙으면서 정종혁 씨, 고은영 씨를 추가로 섭외해서 지희가 학부생 3명과 직접 일하고 나는 원격으로 미팅에 참여하면서 연구를 발전시켜 갔다.

설문 결과를 분석하니 사람들은 예산의 중요성은 인지하면서도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데, 특히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해석을 하거나 의견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부분이 언론을 통해서 예산에 대한 정보를 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신문기사 내용에 맞는 적절한 예산정보를 자동으로 추가하고 기사에 등장하는 예산과 비슷한 규모의 다른 예산을 보여주어 판단에 도움을 주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보다 사실에 근거한 토론을 할 수 있게 돕는 Factful이라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었다. 초기 버전을 가지고 CSCW에 제출했지만 아쉽게 떨어졌다. 또한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사회이슈와 예산 간의 연관성을 크라우드소싱 형태로 얻어내고 이를 시각화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BudgetMap이라는 인터페이스도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Stanford 시절 나와 같이 석사를 하고 그 당시 한국서 병역특례를 하며 박사준비를 하던 김남욱을 섭외하여 진행했다.

제대로 연구를 진행하려다 보니 원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지희와 나는 파격적으로, 여름에 한 달 동안 지희와 학부생 세 명이 내가 인턴을 하는 Seattle로 와서 같이 연구를 진행하자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Airbnb 집을 구해서 숙소 겸 일하는 공간으로 쓰고, 은영 씨에게는 민박집을 구해주었다. 마치 스타트업을 하듯, 지희와 학생들이 낮에 일하고 나는 퇴근을 하고 저녁에 합류해서 또 같이 일을 하는 식으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같이 인턴을 하던 윤동욱, UW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홍성수 형, MSR에 근무하던 박현정 형 등 지인들과도 종종 만나 어울리면서 학생들도 좋은 자극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독특한 상황에서 연구 경험을 하면서 학생들도 힘들었을 텐데, 다들 너무 열심히 잘 해주었다. 내가 KAIST에 갈 수 있어서 이런 학생들과 일할 수 있다면 보람도 있고 제대로 연구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창원 씨는 BudgetWiser 연구를 계속 이어서 돕다가 산업기능 요원으로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종혁 씨도 우리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고 졸업해서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은영 씨는 HCI 연구의 길로 진로를 결정하고 우리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남욱이는 Harvard에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여 시각화 연구를 계속 진행하며 졸업을 앞두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4월 UIST 학회에 LectureScape과 CAKS 논문을 내고, 틈틈이 BudgetWiser 연구도 원격으로 진행하면서 5월 CSCW 학회에 Crowdy와 Factful 논문을 내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또 같은 시기에 Anant가 Cobi의 후속 연구를 진행하면서 HCOMP 학회에 논문 준비를 했는데, 여러 교수가 프로젝트에 관여하다 보니 오히려 아무도 신경을 못(안) 쓰는 상황이 되어 내가 방향을 리드하고 Anant가 실제 논문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논문 5개를 두세 달에 걸쳐 쏟아내고 나니 봄이 지나고 학기가 끝났다. 하얗게 불태웠던 봄을 뒤로 하고 인턴십을 위해 Seattle로 날아갔다.

MSR 인턴십

UIST, CHI 같은 우리 분야 최고 학회에 1저자 논문이 나오기도 했고 연차도 올라가서 내 연구를 아는 사람도 조금씩 생겨서 그랬는지 MSR(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인턴십 제의가 왔다. 전산학 분야 전반에서도 그렇지만 HCI 분야에서 MSR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HCI 연구자만 어림잡아 20~30명 정도 되는 큰 조직이었고, 최고 학회에 가장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조직 중 하나이기도 했다. 졸업하기 전에 한번 꼭 인턴으로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곳이었는데, 좋은 타이밍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 소셜 컴퓨팅 분야에서 좋은 연구를 하는 Merrie와 Andrés가 공동 멘토였고, 연구실 동료인 Elena도 같은 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Elena와 나는 Office Mix라는 제품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했다. Office Mix는 강의자가 Powerpoint 슬라이드 위에 설명을 더하고 중간중간에 퀴즈 등을 담아서 온라인 비디오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다. 비디오 학습이라는 내 연구주제와 운 좋게도 딱 맞는 제품이었고, 여기에 보다 향상된 기능을 구현해서 넣고, 실제 선생님과 학생들이 유용하게 쓰는지 사용성 스터디를 해보는 연구를 했다. 나처럼 새로운 인터페이스나 도구를 만드는 HCI 연구를 하면, 보통 (1) 뭘, 왜 만들어야 할지 탐색하고 (2) 기술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3) 사용자들이 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보다 나은 경험을 하는지 측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Merrie는 이미 내가 충분히 성숙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본인의 스타일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1), (2)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내 결정에 맡기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다만 엄청 꼼꼼하게 일정을 챙기고 환경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지원해 주었다. Merrie는 굉장히 꼼꼼하고 체계적이고 똑 부러지는, 또한 자기관리에서도 빈틈없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Merrie는 오피스에 의자가 없이 책상이 달린 러닝머신 위에서 걸으면서 일을 하고, 인턴 첫날 미팅에서 12주 뒤의 farewell lunch의 요일과 시간을 정해서 캘린더 초대를 보냈다. (3)에 있어서는 회사의 엄청난 자원과 지원에 놀랐다. 사용성 스터디는 HCI 연구자라면 누구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어려워하고 힘들어한다. 일단 참여자를 섭외해야 하고 실험환경 자체를 준비, 구축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실제 스터디 세션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스터디를 하면 연구를 주도하는 학생이 이 모든 일을 맡아서 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은데, 특히 참여자가 부족한 경우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동원해서 친구들에게 고생을 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내가 원하는 참여자의 조건과 숫자를 알려주니 UX 지원 조직에서 섭외와 스케줄링을 알아서 해주고, 나는 그 시간에 나타나서 세션 진행만 하면 되었다. 특히 실제 초, 중등학교 선생님과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있어 교육 관련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더욱 좋았다.

4년 차를 마치며

시애틀의 환상적인 여름 날씨와 월드컵, MSR의 인턴십과 BudetWiser 연구가 어우러져 바빴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많았고 이제는 이들을 구체화하고 연구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교수나 멘토가 하라는 것을 하기보다 내가 스스로 연구의 방향을 만들어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4년 전 월드컵 때는 박사 시작 직전이라 막연한 기대감에 들뜨고 여유 있었는데, 4년 후 다시 월드컵을 맞는 이 여름, 나는 박사과정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이 블로그의 제목처럼 “a small step forward”가 매일매일 느껴지는 시간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9월 CHI 데드라인에는 7개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산적인 여름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을 안고 Boston으로 돌아가기 전날.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유학을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상황. 내가 유학 나와 있을 때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그런 일. 인턴십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신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먹먹한 마음을 안고 Boston이 아닌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박사과정을 돌아보며”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