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팀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팀마다 team dynamics 가 다르고 필요로 하는 skill set 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HCI 연구자로서 나의 위치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해 보게 된다.
기존에 하던 연구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CS 기반의, tool을 만드는 HCI 연구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의 일은 절반이 사용자 관찰, 인터페이스 설계이고 나머지 절반이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 구현이다. 기본적으로 연구는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따르면서 진행된다. 교수님은 사용자의 니즈에 기반하지 않은 엔지니어링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항상 사용자 관찰, 워크샵, 인터뷰 등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모든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결정을 내린다. HCI 연구 치고 지금 만드는 툴은 꽤나 복잡한 구조와 머신러닝, 그래프 매칭 등의 알고리즘을 필요로 한다. 두 가지 고유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경계를 없애나가는 것이 연구의 묘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언론정보학과 정도 되는 Communication 과에서 하는 프로젝트에서는 좀더 하드코어 엔지니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기술 자체의 완전성보다는 기술이 사람의 감정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정밀한 실험 설계와 통계적 데이터 분석 등의 스킬이 필요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연구의 방향 자체는 훨씬 문과적이고 공학적이지 않지만, 나의 역할은 바로 이 ‘기술’을 구현하는 일이다. 이쪽 사람들과 일을 하는 데에 있어 내가 상대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가장 문과적인 프로젝트에서 가장 공대적인 일을 한달까.
마지막으로 MBA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의 벤처 프로젝트에서 나의 역할은 User-centered design expert 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나는 사용자 인터뷰와 survey 를 디자인하고, UI 에 대한 제안을 하고, 전반적인 UX 를 향상시키는 쪽에 집중한다. 내가 팀에 가져다 주는 가치는 바로 ‘방법론’에 있다. HCI 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기법들은 ‘what’ 을 중시하는 비즈니스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how’의 답을 제공해 준다. 내가 가장 많이 외치는 단어들은 ‘design process’, ‘rapid prototyping’, ‘iterative’, ‘brainstorming’, ‘alternatives’, ‘user observation’ 같은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서로 보완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비즈니스 프로세스에 디자인 프로세스가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는가를 체험하는 흥미로운 시간이다.
결국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정확한 정체성이다. 프로젝트마다 역할을 달리 하여 팀에 기여하는 것도 좋은 것이고 뚜렷한 전문성을 갖추어 나가는 것도 매력적이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HCI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하면, 특히 나처럼 CS 출신인 사람들은 software engineer 와 interaction designer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고민한다. 둘다 좋아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찌보면 하드코어 엔지니어도, 디자이너도 아니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면도 많다. 문제는, 많은 회사들에서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을 반겨는 하면서도 뽑는 과정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방법을 고수한다는 데에 있다. 결국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고, 대개는 그 중 하나의 포지션을 택하고 다른 종류의 ‘감각’을 가진 사람 정도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이를테면 user-centered design 감각을 지닌 엔지니어 내지는 공학적 배경을 지닌 interaction designer 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좋다. 위에 언급한 세가지의 프로젝트 중 가장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첫번째이다. 나의 위치와 정체성을 위한 꾸준한 탐색 — 아니 어찌보면 맞는 옷을 찾기 위한 버둥거림 정도가 더 어울릴지도 – 을 통해 찾아낸 최적의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벤처도, 회사도 아닌 HCI 연구자로서 나의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다. 선택 이후에 그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선택 이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때 가졌던 생각들을 잊지 않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