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봉사 과목을 겨울 계절학기에 신청한 이유는 사실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교과서적인 마인드보다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끄럽게도 이 활동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분야로 계속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여름 유학을 앞두고 우리 사회의 보다 많은 영역을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실 이전에는 봉사활동 같은 것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회봉사를 통해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흔히 ‘사회봉사’ 라고 하면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노인 분들이나 장애를 겪는 분들을 도와드리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봉사기관을 찾다가 시민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전공인 컴퓨터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법률 소비자 연맹’을 선택했다. 가장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서 생소한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문한 시민단체에 대한 인상은 ‘작은 거인’을 만난 느낌이었다. 이 곳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일의 범위는 매우 다양하고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기에 상근하고 있는 분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나머지 활동은 모두 나와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공익에 기여하는 활동을 제시하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분담하는 형태. 미래형 조직은 이러한 식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틀에 걸쳐 약 8시간의 법률 강좌 겸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법’과 ‘사법’에 대해 무지했는지, 또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을 알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찾는 작업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틀간 교육의 수확이라면 난생 처음 헌법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 학기에 수행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법정 모니터링과 학술 모니터링이었다. 약간은 성역처럼 느껴졌던 법원에 서너번 방문을 하면서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턱이 낮고 열려 있어야 할 공간이 바로 법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방문했던 민사, 형사, 소액법정에서 다루었던 수많은 재판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정직한 현재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처음으로 찾아갔던 법정은 민사법정이었다. 미국법정은 영화 등을 통해 익숙한데 정작 우리나라 법정은 모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혼 관련 재판에 관한 것이 전부였으니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이 분야에 대해 무지했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됐다. 첫 느낌은 엄숙했지만, 여러 법정을 들어가면서 꽤나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민사재판의 내용 자체가 사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한편 두 번째 모니터링 때 찾아간 형사법정은 민사법정과는 또다른 분위기였다. 사건의 심각성이나 강도도 훨씬 높아보였고, ‘형사’라는 말 자체가 주는 묘한 긴장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검사의 존재도 다른 부분이었다. 처음 들어간 형사법정에서는 마약 사범이 재판을 받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해서는 숨죽이고 재판을 지켜보았다. 변호사는 피고의 안타까운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이전에도 마약으로 인한 전과가 있던 피고는 출소 후 굳게 마음을 먹고 착실하게 살아가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장병에 걸린 아버지와 백혈병에 걸린 조카, 이들을 돌봐줄 이는 자기밖에 없지만 돈도, 희망도 없는 상황. 그리고 때마침 주위에서의 강한 유혹.
누가 들으면 드라마 같다고 할만한 일들이 법정에서는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나고 있다. 그 안에서 법조인들은 보다 엄정하고 투명하게 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당사자들은 때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고, 때로는 자신의 명예와 소신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재판에 참여한다. 그리고 법률 소비자 연맹 같은 시민단체가 이러한 활동들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니터링 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법이라는 제도를 통해 맞물려 상호작용 하는 과정에 내가 직접 참여해 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차례의 학술 모니터링 역시 잊을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 첫 번째 행사는 여성신문에서 주최하는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 지도자상 시상식이었다. 이 행사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장하진 여성부장관, 현정은 현대 회장 등 우리나라 여성계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들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소중한 시간이었다. 참석자의 80% 이상은 여성이던 이 날 행사에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계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마인드를 읽을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말처럼 ‘성 자체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가 곧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 행사는 언론학회에서 주최하는 새 정부의 미디어 정책과제 토론회였다. 신문과 인터넷에 대한 토론이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학계와 산업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러한 토론의 의미와 파급력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가를 지켜보는 것도 앞으로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 질문에 대해 얻은 답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법률 / 학술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보다 넓은 시야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감히 자신한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나의 시야가 조금은 넓어지지 않았나 싶다. 또 하나 든 생각은 ‘봉사’라는 말의 의미이다. 봉사라는 단어에는 나를 희생한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은데, 봉사는 하는 사람이 오히려 얻는 것이 많은 활동이 아닐까. 그래서 봉사라는 말보다는 말 그대로 volunteer work, 자원 활동을 한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얻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나 이렇게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가는 핵심이 아니라는 교훈을 또한 얻었다. 교훈은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알아서 찾아오는 것일테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당한 권리와 다양성이 보장되는지 끊임 없이 질문하고 또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미력하나마 기여하는 것으로 나의 자원 활동은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법률 소비자 연맹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