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학 / 물을 문. 학문을 하는 사람, 즉 학자란 묻는 법을 익히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
기본 중의 기본을 새삼 많이 느낀다. 이기적이라 할만큼 나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묻고 대화하고 깨달아 나가야 한다. 이해를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고 넘어가다가는 결국 벽에 부딪힌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학습 문화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라고 느낀 것이 바로 내 이해정도에 대한 피드백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었다. 아니 어찌보면 나라의 차이도 있겠지만 나의 습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연구 미팅을 한다고 가정하자. 새로운 연구 결과나 용어가 언급이 되면, 나는 머릿속에서 ‘아 모르는거네.. 나중에 찾아봐야지’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전체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암묵적으로 ‘어느 정도 선’까지 정보를 얻으면 알아서 나중에 내가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나가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곳 친구들은 상대가 누구건 상관없이 자신이 완전히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묻고 또 묻는다.
얼마전 어디선가 본 글이 기억에 남는다. “영어권 문화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말을 청자에게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동양 문화에서는 청자가 화자의 의중을 파악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영어권 문화에서는 “You know what I’m saying?”, “Am I making myself clear?” 라는 말이 화자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자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이해의 과정이 화자의 말 중간중간 바쁘게 돌아간다.
또하나 느낀 건 바보같은 질문이어도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질문은 단순히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소통이고 또 논의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역시 미팅에서 많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누군가가 굉장히 단순해 보이고 지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굳이 저런걸 왜 지금…’ 그런데 이제부터 마술이 일어난다. 상대방은 굉장히 성실하고 깊이있는 답변을 한다. 그리고 대화는 점점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부분으로 조금씩 확대되고, 논의는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된다. 질문을 통해 새로운 토픽이 제시되고 새로운 관점이 더해져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결국 연구의 본질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남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하려면 취직을 하면 되고, 내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하고 싶으면 (꼭 해야되는 것 같지는 않다 ㅎㅎㅎ) 연구를 하면 되는 것 같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벤처나 창업. 역시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답하는 방법을 찾아야하는 과정이다. 이게 매력일지도.
연구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세가지 질문의 방법을 계속 머리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
– 나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 주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 교수에게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