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이 나의 기적이다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한국만큼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에 도취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름 여유있는 상황 속에서 즐기고 있다. 나에게 있어 월드컵은 늘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기대감, 초조와 불안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리스와의 첫경기를 보면서는, 이상하게 다른 월드컵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적을 바라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객관적인 실력으로 압도한 경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의 월드컵 경기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우리나라의 월드컵 도전사는 그야말로 a small step forward 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우선은 월드컵에 진출을 해야 했고, 월드컵 첫 선취골을 얻어야 했고, 첫 승점을 얻어야 했고, 첫 승리를 해야 했고, 첫 16강 진출을 해야 했고, 첫 원정 승리를 해야 했고… 이렇게 한단계씩 밟아 왔다.

 

우리나라의 근 20여년 간의 월드컵 경기들을 봐오면서 느낀 점은, 기적이나 요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기를 보면서 언제나 마음을 졸이게 되기는 하지만, 결국 결과는 늘 가지고 있는 실력만큼 나오더라. 이 거친 토너먼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정답은 운이 아닌 실력이다. 실력이 있어야 운이 찾아왔을 때 활용할 수도 있는거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탑 컨퍼런스에 논문을 쏟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힘들여 쓴 논문이 리젝도 먹어 보고, 교수님에게 까여도 보고, 엄청 삽질한 실험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나씩 배우고 단단해지는거다. 일희일비하는 예민함과 민감함보다는 무던히 자기의 갈길을 가는 우직함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초조해 할 필요도,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할까 자책할 필요도,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안달낼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과 내가 몸담고 있는 장소,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미 최적의 환경이다. 바로 이런 환경을 만나고 싶어서 그동안 그렇게 불안해 하고 밤을 지새며 아등바등 애를 쓰며 살았던 것이니까.

 

이제는 바로 지금,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밟아나가면 된다. 헝그리 정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마인드도 물론 필요하지만, 지금 내게 더 절실한 건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안정감과 여유를 가지고 생각을 펼쳐낼 수 있는 자신감이다.

 

꾸준함, 안정감과 자신감이 바로 10000시간 법칙, 10년 법칙이나 deliberate practice 등에서 이야기하는 제대로 된 학습법의 핵심이 아닐까.

 

기적과 같은 승리, ‘마법’이 통해서 얻은 결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변보다는 덜 극적이어도 ‘실력과 노력의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귀결’이 훨씬 멋있다. 그 길을 위해 무미건조하고 지루해 보이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나도 그들과 같은 걸음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